▶ 스무 살엔, 서른 살이 넘으면 모든 게 명확하고 분명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반대다. 오히려 '인생이란 이런 거지' 라고 확고하게 단정해 왔던 부분들이 맥없이 흔들리는 느낌에 곤혹스레 맞닥뜨리곤 한다. 내부의 흔들림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일부러 더 고집 센 척하고 더 큰 목소리로 우겨 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말들은 잘한다. 각자의 등에 저마다 무거운 소금 가마니 하나씩을 낑낑거리며 걸어가는 주제에 말이다. 우리는 왜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판단하고 냉정하게 충고하면서 자기 인생의 문제 앞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헤매기만 하는 걸까.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은수와 유희, 재인은 모두 서른한 살이라는 짐을 지고 좌충우돌한다. 그들이 그런 혼란을 겪게 된 것은 두 가지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남은 수많은 세월을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남자의 경우 서른 살은 직장에서 2~3년차로 정신없이 바쁠 때다. 그러나 여자는 대부분 서른 살이면 5~6년차가 되면서 결혼과 직장 문제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우선 결혼 문제를 들여다보자. 결혼 적령기가 늦춰지면서 여자의 경우 결혼하는 평균 연령이 스물여덟으로 높아졌다지만 서른 살의 벽은 여전히 존재한다. 서른 살인데도 결혼을 안 했거나 결혼할 애인이 없으면 주위에서 가만히 두질 않는다.
오죽하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 '정상적 인생의 알리바이'를 마련하고자 결혼을 하겠는가. 꿋꿋이 사회와 주변의 위협?을 잘 넘겼더라도 서른다섯 살이 되면 또다시 심리적인 위축을 받게 된다.
직장 생활은 또 어떤가. 입사했을 때의 의욕과 패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일에 대한 회의가 찾아든다. 직장은 자아실현의 장이라는데 현실에서 직장은 돈을 대가로 나의 자아를 착취하는 곳일하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어릴 적부터 꿈꿔 온 일은 그냥 꿈이었다고 접고 싫든 좋든 나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실패할 위험을 무릎쓰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 것인가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나이 서른에 나를 찾을 것인가,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을 하게 된다.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주인공들은 그 고민 끝에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간다. 백수였던 재인은 선본 지 한 달 만에 조건 좋은 의사와의 결혼이란 안정적인 제도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유희는 "더 늦으면 후회할 것 같아"라며 과감히 직장을 때려치우고 "이젠 진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 거야"라며 그녀의 꿈이었던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노래와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반면 직장 7년차인 은수는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일곱 살 연하의 태오라는 남자와 풋풋한 사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은수는 자신의 나이에 짓눌려 사랑에 푹 빠지지 못한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직장을 그만둔 은수는 아무 감정도 안 생기지만 안정되어 보이는 영수란 남자와 어정쩡한 만남을 지속하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세 여자의 성인식은 모두 힘겹고 녹록지 않다. 그저 사회적인 안정을 바란 재인의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리고, 뒤늦게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유희는 번번이 오디션에 떨어진다. 결혼을 앞둔 은수는 영수의 어두운 과거를 알게 되고 결혼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들에게 서른한 살은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삶 그 자체였다. 그들은 볼멘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왜 내 삶은 남들처럼 쉽지 않은 거죠?"
재인에게는 사랑도 없이 한 달 만에 조건만 보고 결혼했으니 이혼으로 치달은 건 당연한 결과라 말하고, 유희에게는 서른 살이 넘어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나서면서 그런 현실에 부딪힐지 정말 예상하지 못했느냐 따지고, 은수에게는 순수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려 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라고 말할까?
아니, 나는 감히 그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내 주위에 있는 서른이 넘은 여자들은 대부분 재인이나 유희나 은수 중의 누군가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지독히 운이 없거나 팔자가 드세거나 야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더라도 많은 여자가 결혼을 안한 채로, 직장에서 세월을 축내며 서른 살을 맞이한다. 그리고 불합리한 현실에 맞서 싸우기엔 현실의 벽은 너무나 공고하다. 유희를 보라. 남들은 늦었다고 하는 나이에 용감하게 사표를 쓰고 꿈을 찾아 나서지만 그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너무나 힘겹기만 하다. 그래서 재인과 은수는 원하는 것을 뒤로하고 현실과 비겁하게 타협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주인공인 츠네오라는 남자가 떠올랐다. 츠네오는 우연히 다리를 쓰지 못해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조제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조제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는 츠네오. 그는 사랑하는 조제를 부모님에게 소개시키기 위해 가던 중 집에 전화를 걸어 못 가겠다는 말을 한다. 그때 전화를 받은 동생이 묻는다
"형 지쳤어?"
츠네오는 결국 조제와 헤어진다. 그 뒤 어느 날 츠네오는 길가의 가드 레일을 잡은 채 통곡을 하고 그 뒤로 그의 독백이 나지막하게 흐른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 댈 수 있지만 사실은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우리는 항상 도망을 꿈꾼다. 자신이 원한 삶이든, 어쩔 수 없이 흘러오다 보니까 살게 된 삶이든 간에 현실은 언제나 도망을 꿈꾸게 만든다. 현실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늘 도망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도망칠 수도, 도망갈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환기구 없는 방에 갇힌 것처럼 끔찍하지 않을까.
그리고 가끔 누군가는 도망을 시도한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현실의 밧줄을 끊고 어디론가 떠나겠다는 자유를 꿈꾸면서 말이다. 그러나 도망은 회귀를 전제로 한다. 도망친다는 것은 자신의 본거지가 지금 머물고 있는 그곳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택한다고 할 것이지 굳이 도망이란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과 삶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물론 도망쳐서 다른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망은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탈출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게다가 도망은 불확실한 세계로 자신을 던지는 것과 같다. 도망가서 머무는 그곳은 또 다른 현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영화나 소설에서 보듯이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그래서 영화에서 도망자는 항상 되돌아오거나, 붙잡혀 오거나, 아니면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방랑자가 되고 만다.
나역시 평생 도망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지금도 도망을 꿈꾼다. 내 일을 사랑하고 내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가끔 나를 옥죄는 현실로부터의 도망을 꿈꿈다 구체적인 목적지도 정해 놓지 않은 채 아주 막연하게 그저 푸른 항공을 떠다니는 자유라는 꿈같은 이름을 찾아서.
그처럼 도망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지중해' 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여덟 명의 이탈리아 군인이 그리스의 작은 섬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미기스티 섬으로 간다. 그러나 그 섬에 도착한 뒤 무전기가 고장나면서 그들은 섬에 고립되고 어느새 사람들로부터 잊혀진다. 남자들은 다 전쟁터로 끌려가 여자들과 노인들만 남은 그 섬에 정착하기로 한 그들은 이후 꿈같은 세월을 보낸다.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였던 중위는 교회 벽화를 그리고, 사사건건 규칙을 고집하던 완고한 상사는 어린아이들과 놀고 춤춘다. 책을 좋아하는 내성적 성격의 병사는 책을 마음껏 읽으며 지내다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여자들이 있고 어린애처럼 춤추고 놀 수 있는 평화로운 작은 섬은, 그들에게는 곧 낙원이었다.
3년 후 고장 난 비행기가 우연히 그 섬에 착륙하고, 그들은 전쟁이 끝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국군에 의해 구조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이미 낙원에서 살고 있는 그들은 굳이 본국인 이탈리아로 돌아가려고 할까? 영화는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결혼한 병사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이 모두 '국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이런 시대에 살아남아서 꿈을 꿀 수 있는 길을 도피뿐이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전쟁을 피비린내 나느 세상에서 지친 남자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그린 영화이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현실로부터 멀어졌지만 미기스티 섬에서 평소 꿈꿔 오던 자유로운 생활을 누린 여덟 명의 병사들. 미기스티 섬은 누구나 염원하는, 세속적인 잣대나 편견 따위가 없는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런 낙원을 버리고 현실로 돌아갔을까? 그들이 그토록 꿈꿔 오던 낙원에서 계속 살 수도 있었는데 왜 그들은 본국으로 다시 돌아간 걸까? 왜냐하면 그들의 정체성은 꿈속의 세상이 아닌 현실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실현시키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미기스티 섬 같은 낙원에서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섬이 어머니의 품을 상징한다면, 그들은 그저 어머니의 품 안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찾아서, 그리고 국가 재건에 한몫을 담당하기 위해서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3년을 머무르면서 미기스티 섬은 이제 그들에게 또 하나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사는 곳은 곧 우리의 현실이다. 생각해 보라. 섬에 남은 병사가 사랑하는 여인과 같이 운영하는 식당은 관광지의 한 식당일 뿐이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규칙과 질서가 있고, 병사가 그곳에 살려면 그 규칙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 즉 또 다른 구속과 억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항상 우리에게 구속감을 불러일으키며,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한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은 섬으로의 도망을 꿈꾸고, 섬사람들은 육지로 도망치는 꿈을 꾼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도망치고 싶다면 생각해 볼 일이다. 당신이 원하는 목적지가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도망치고 싶은 건지를 말이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그저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다면 당신은 도망쳐서 자유를 얻는 게 아니라 당신을 더 옭아맬 수 있는 또 다른 현실을 만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망친 낯선 미지의 땅에서 해답을 찾기보다는 지금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오히려 현명할 수 있다.
문득 학창시절 좋아해서 외우고 다녔던 영시가 생각난다. 제목과 사인은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이 시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도망을 꿈꾸고 살았음을 증명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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