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의식에 대해 알아야할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의식으로의 '이행'이 갖는 의미다 이행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인 의미에만 몰두하면 자칫 무의식이 점차 사라지면서 의식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행이란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의식을 중심으로 판단과 행위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해서 무의식이 사라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아무리 억눌린다 하더라도 본능적 욕구는 인간인 이상 사라질 수 없다. 다만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제대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의식의 이면으로 숨기는 것이다. 워낙 오랜 기간 억압을 받기 때문에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속 깊고 어두운 구석에 무의식의 형태로 존재할 뿐이다.
무의식은 수면 아래에 있다가 의식의 빈틈을 뚫거나 의식과 섞여서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원래의 내용과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억압된 것은 무의식의 우너형"이기 때문이다. 원형은 평소에도 계속 억압되기에 굴절되고 왜곡된 형태로 등장한다.
이를 연결된 두 개의 방으로 생각하면 보다 이해가 쉽다. 우리의 정신 안에는 각각 무의식과 의식이 거처하는 방이 있다. 의식의 방은 외부에 알려져 있고, 스스로도 항상 인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무의식의 방은 애초에 집이 만들어질 때부터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다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방을 밝히는 조명도 없다. 두 방을 연결하는 복도 중간에는 무서운 경호원이 있어서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의식의 방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만약 무의식의 방에 있던 충동이 의식의 방으로 향하더라도 복도에서 이 경호원에게 제지를 당하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이 경호원은 무의식적 충동을 불량배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무의식은 원형이 아닌, 다양한 방안을 강구한다. 변장을 해서 다른 모습으로 경호원을 겨우 통과하는 것이다. 충동은 잠들었을 때에도 꿈을 통해 들어가려 하지만, 꿈 역시 경호원이 통제하므로 꿈속에서도 변형되고 굴절된 모습을 취한다. 그 결과 정신은 기본적으로 세 개의 모습을 띠게 된다. 첫째는 무의식의 방에 들어 있는 무의식의 원형이다. 직접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지만 끊임없이 의식을 흔드는 동기 역할을 한다. 둘재는 변형과 굴절을 통해 간신히 경호원의 감시와 통제를 뚥고 의식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전의식'이다. 셋째는 의식이다. 전의식은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 성적 본능을 비롯한 일차적 요소에 영향을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 의식의 특징인 언어와 논리적 사고의 영향도 동시에 받는다 그러니 무의식과 전의식은 원형과 변형인 셈이다. 특히 전의식은 의식과 섞여서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정신활동 방향은 무의식에서 전의식을 거쳐 의식으로 나아간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이행'은 바로 이러한 흐름과 각각의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가 사라지고 다른 하나가 이를 대체하는 방식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가각 존속하면서 끊임없이 흐르는 과정이다. 심리학을 통한 정신분석이란 각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이 흐름을 규명하는 작업이다.
프로이트는 그동안 정체를 알 길이 없었던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설정하고, 의식이 무의식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섬임을 규명했다. 또한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밝혀냈다. 나아가서 한편으로 사회적 도덕률에 의해 본능이 억제되고,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서로 다른 억압이 나타나 개인의 심리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원인과 개인적 원인을 통일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억압을 사실상 성 본능에 대한 것으로만 보는 경향은 많은 한계를 남겨놓았다.
사회적 요인조차도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유아기에 억눌렸던 개인의 경험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융이 보기에 무의식에는 유아기를 넘어 이전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요인이 있다. 바로 개인을 넘어 민족이나 종족, 나아가서는 인류까지 확대되는 집단적 층 이다. 개인과 집단의 차이를 생각하면 그의 문제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집단' 즉 사회 구성원 전체에 적용되는 무의식이 존재하려면 개인의 성장 과정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개인의 삶에서 최대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시기는 유아기다.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원초적인 시기이기 때문이다. 바로 프로이트가 추적을 멈춘 곳이다.
그런데 집단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유아기를 넘어서 출생 이전으로, 그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여러 세대로 파고들어야 한다. 공동체 전체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려면 상당한 시간이 축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이외에 또 다른 요인도 필요하다. 개인 무의식을 넘어서려면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파급력을 지닌 무언가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할 만판 보편적 성격을 지녀, 적어도 그 사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거의 빠짐 없이 접할 수 있어야 하고, 의식과 무의식 모두에 강한 족적을 남길 정도로 위력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융은 유아기 이전을 추적하고, 공통적으로 파급력을 지닌 요인을 규명하기 위해 '원형'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무속신앙이나 주술 등 다양한 신비적 전통이 조선시대 내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민족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신과 악마 천국과 지옥, 죄악과 구원, 종말과 구세주 등 신화 유형에 의해 대대로 축적된 사고방식과 감정은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는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행위만이 아니라, 일체의 사악한 행위도 포함된다. 집단 무의식은 워낙 오랜 기간 매일의 일상에 파고들면서 두터운 층을 형성한다.
일종의 광기가 편협한 망상이나 심한 편향을 만들어 마음의 균형을 위태롭게 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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